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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릴 땐 "어묵"이란 말이 없었습니다 — 1부: 도미표 생선묵의 시대

kafe 2026. 4. 16.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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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 앞에서 "오뎅 한 꼬치요" 하고 주문하는 게 자연스러운 분들, 어머니가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시던 그 빨갛고 납작한 걸 "덴뿌라 조림"이라고 부르셨던 기억이 있는 분들. 네, 바로 그 세대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해 못 할 장면이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한국에 "어묵"이라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시장에서도, 포장마차에서도, 심지어 대기업 제품 포장지에서도요.

오늘은 그 "어묵"이라는 말이 한국에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 흥미로운 탄생 과정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980년대, "어묵"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팩트 하나를 짚고 가겠습니다.

CJ제일제당 공식 자료에 따르면, 국내 최초로 "어묵"이라는 이름을 붙인 제품은 1985년에 출시된 삼호어묵입니다. 그 전까지 한국 시장에서 이 음식은 전부 "오뎅"이나 "덴뿌라"로 불렸습니다. 일본어 그대로요.

저희 어머니도, 옆집 아주머니도, 학교 앞 분식집 주인도 전부 "오뎅 주세요", "덴뿌라 사다 달라"고 하셨지요.

그게 어색하지도 않았고, 그 단어가 일본어인 줄도 모르고 사용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80년대 중반 재래시장의 이색 풍경

제가 사는 동네의 재래시장에서는 1980년대 중반쯤 특이한 장면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좌판 위에 튀김 솥을 걸어두고, 그 자리에서 반죽을 만들어 즉석에서 오뎅을 튀겨서 파는 방식이었어요.

처음엔 구경거리로 인기였습니다. 따끈따끈한 튀김을 눈앞에서 만들어주니까 신기하고 맛있어 보였지요. 줄을 서서 사 먹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고요.

하지만 그 인기는 얼마 못 갔습니다. 재료가 문제였거든요. 기름은 하루 종일 반복해서 쓰고, 반죽은 밀가루 비율이 너무 높고, 어육 함량은 낮은 데다 어떤 생선인지도 알 수 없는 잡육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기성품 어묵보다 특별히 맛있지도 않다는 게 드러났고, 한두 해 유행하다 시들해졌지요.

대기업이 "어묵"이라고 부르기로 한 이유

그 무렵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공장 생산 어묵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대기업이 자사 제품을 "오뎅"이나 "덴뿌라"라고 광고할 수는 없었어요.

명색이 큰 기업인데 일본어를 그대로 쓰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던 거지요. 그렇다고 그걸 "어묵"이라고 부르자니, 당시엔 그 말 자체가 생소했습니다.

이 과도기의 흔적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제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최근 확인해보니 실제로 자료가 있었습니다. 바로 "도미표 생선묵"입니다.

도미표 생선묵, 햄쏘세지 봉투. 지금은 없는 한국식품공업
도미표 생선묵, 햄쏘세지 봉투. 지금은 없는 한국식품공업

 

 "오뎅"도 "덴뿌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어묵"도 아닌 "생선묵"이라는 과도기 용어가 쓰였던 거지요. 제조사는 한국식품공업, 유통은 럭키 슈퍼체인입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자료도 나왔습니다.

1986년에 공중파 광고까지 했던 도미표 생선묵
1986년에 공중파 광고까지 했던 도미표 생선묵

 

1986년 12월 실제 TV광고 방영 목록입니다.

1986년에 그 비싼 전국 공중파 광고까지 했던 도미표 생선묵. .롯데 빼빼로, 동서식품 맥심, 대우자동차 르망 같은 당시 유명 광고들과 같은 시기에 방영된 걸 보면 꽤 큰 규모의 광고주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포장지에서는 "생선묵"이었는데, TV광고에서는 점차  "생선어묵"으로 미묘하게 이름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1985년 삼호어묵이 "어묵"이라는 단어를 처음 시장에 내놓은 뒤, 경쟁사들이 "생선묵"에서 "생선어묵"으로, 결국 "어묵"으로 용어를 옮겨가던 과도기의 실시간 기록인 셈입니다.

알라스카 원양어업 어육을 써서 "알라스카에서 왔습니다"가 광고 슬로건 이었던 삼호어묵
알라스카 원양어업 어육을 써서 "알라스카에서 왔습니다"가 광고 슬로건 이었던 삼호어묵

용어 진화의 5단계

정리하면 이런 흐름이 됩니다.

시기 시장에서 부르던 이름 근거

~1970년대 오뎅, 덴뿌라 일본어 그대로 사용
1980년대 초중반 생선묵 도미표 포장지
1985년 어묵 (최초) 삼호어묵 출시
1986년 생선어묵 도미표 TVCF 광고
1990년대 후반~현재 어묵 (통일) 표준어 정착

삼호어묵이 "어묵"이라는 깃발을 먼저 꽂고, 시장 전체가 그 단어로 수렴되는 데 약 10년 정도가 걸린 셈입니다. 그 사이에 "생선묵", "생선어묵" 같은 과도기 명칭들이 공존했고요.

1부 5줄 요약

  • 1985년 이전에 한국에는 "어묵"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오뎅·덴뿌라로 불렸습니다
  • CJ 삼호어묵이 1985년 국내 최초로 "어묵" 명칭을 도입했습니다
  • 대기업은 일본어 "오뎅/덴뿌라"를 쓸 수 없어 "생선묵"이라는 과도기 명칭을 썼습니다
  • 도미표 포장지와 1986년 TVCF 목록에 "생선묵", "생선어묵"이 실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어묵"이 시장 표준어로 자리 잡는 데 약 10년이 걸렸습니다

다음 편 예고

여기까지가 "어묵"이라는 말이 한국에 태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저도 새삼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썼던 "덴뿌라"와 "오뎅"이라는 말, 정작 일본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요. 덴뿌라는 원래 어묵이 아니고, 오뎅도 어묵이 아닙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두 단어의 진짜 의미와, 우리가 수십 년간 잘못 알고 있었던 이유, 그리고 제가 2000년대 초반 도쿄 편의점에서 경험한 당혹스러운 장면까지 함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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