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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친절'을 믿지 마세요 — 일본인 사수가 했던 두가지 말

kafe 2026. 4. 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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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일본에 다녀와서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 정말 친절해."

 

가게 점원의 깍듯한 인사, 길을 물으면 직접 데려다주는 행인, 회사 동료의 정중한 미소까지. 일본의 첫인상은 거의 예외 없이 '친절'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일본인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한국식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뜻하다, 정이 있다, 사람이 좋다.

 

그런데 그 '친절'을 한국식으로 받아들였다가 인생에서 가장 묵직한 한 방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집니다.

 

지난 글에서 시나가와의 동네 이자카야 이야기를 했었지요. 같은 시기, 그 도쿄 직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면전에서는 한없이 친절한 일본인
면전에서는 한없이 친절한 일본인

외국인 둘과 일본인들 사이에서

2000년대 초반, 저는 거의 모든 직원이 일본인인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우리 부서의 외국인은 영국인 본부장과 한국인 동료, 그리고 저까지 셋이 전부였어요. 한국에서의 실무 경력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경력자를 구하기 어려운 분야였기 때문에 직무 자체에 대한 이해와 경험은 부족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언어였습니다.

일본어와 영어 모두 기본적인 대화는 가능하지만 일본인들만 있는 회사에서 일본어로 업무를 하기에는 서툴렀던 저에게 매일 출근은 작은 전쟁이었어요. 머릿속에는 분명한 의견이 있는데 일본어로 풀어내는 데 시간이 걸리고, 회의에서 빠른 일본어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정작 내가 하려던 말을 놓치는 일이 흔했습니다. 영국인 본부장도 일본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분이라 오히려 일본어로 업무 지시를 했으니, 실력만큼 어필할 수단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차이가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제 사수는 좋은 대학을 나온 전형적인 엘리트 일본인이었습니다. 직급상으로는 제 위였지만, 실무 경력은 비슷한 수준이었고, 분야에 따라서는 오히려 제가 더 많은 경험을 가진 부분도 있었어요. 다만 일본 회사라는 환경, 그리고 일본어라는 도구의 차이가 우리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리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사수는 나름 매너는 정중했으며, 한 번도 큰소리를 낸 적이 없었어요. 다만 일본인 특유의 '거리감'은 늘 있었습니다. 같은 사무실에서 매일 얼굴을 보면서도, 업무 이야기 외에는 사적인 대화가 거의 없는 그런 관계였지요.

어느 야근의 밤, 갑작스런 저녁 제안

도쿄시내 야경
도쿄시내 야경

그러던 어느 날, 야근을 하던 늦은 저녁이었습니다. 사수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오늘 같이 저녁이라도 드시겠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일본인 사수가 한국인 부하 직원에게 사적으로 식사 제안을 하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저는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외로운 도쿄 생활에서 모처럼 마음이 풀어지는 순간이었어요.

 

술자리가 무르익자 사수가 먼저 물었습니다. "일본까지 와서 일하시는데, 어려운 점 없으세요?" 저는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사실 일본어가 부족해서 매일 힘들고, 제 실력만큼 의견을 못 내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그 순간 사수의 반응은 정말 강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두 손까지 내저으며 거의 무안할 정도로 부정했어요. "당신은 실무 경험도 풍부하시고, 누구보다 열심히 하신다는 거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걱정은 절대절대 하지 마세요.", "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충분합니다. 어려운 일 있으시면 언제든 저에게 상의하세요."

 

그때까지 저는 한국 드라마나 일본 예능에서나 보던, 그 일본인 특유의 과장된 리액션을 처음으로 직접 받아본 순간이었습니다. 두 손을 크게 내젓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의 외치듯이 부정하는 그 모습. TV 화면 너머에서만 보던 장면이 제 눈앞에서, 저를 향해 펼쳐지고 있었어요.

퇴근 후 조촐히 마시는 기린 이치방 시보리 한잔
퇴근 후 조촐히 마시는 기린 이치방 시보리 한잔



그날 밤 저는 마음속 무거운 짐을 한 꺼풀 벗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 내가 너무 위축돼 있었구나. 사수가 저렇게 인정해주는데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그날 밤은 도쿄에 온 이후 마음이 따뜻했던 밤 중 하나였습니다.

 

그 후 몇 달, 그리고 인사 평가 자리에서 들은 한 마디

그 후 몇 달이 지났습니다. 사수와 저는 변함없이 함께 업무를 진행했고, 큰 사고 없이 프로젝트를 마쳤습니다. 그동안 사수는 단 한 번도 제 일본어 실력에 대해 지적하거나 시정을 요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작은 잔소리도, 미묘한 사인도 없었어요. 모든 게 평온했습니다. 저는 사수가 술자리에서 했던 그 강한 격려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그것을 '진심'이라고 믿었습니다.

 

이후 저는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고, 그 사수와도 자연스럽게 헤어졌습니다. 헤어질 때까지도 제 머릿속에는 그날 술자리의 따뜻한 격려가 남아 있었어요. '좋은 사수였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연말이 되어 연봉 협상 시즌이 다가왔습니다. 회사에서는 본부장과 팀장이 참석하는 인사 면담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그동안 함께 일했던 상사가 직접 평가 의견을 개진하는 절차였습니다. 저는 이미 다른 부서로 옮긴 뒤였지만, 그 자리에서 제 평가가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나중에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 사수가 본부장과 팀장 앞에서 직접 했던 말은 이랬다고 합니다.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아서 함께 일하는 데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건 종이 한 장에 적힌 문장이 아니었어요. 본부장과 팀장이라는 윗사람들 앞에서, 본인이 직접 입을 열어, 저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시스템이 자동으로 그렇게 작성한 것도 아니었어요. 사수가 자기 입으로, 자기 의지로 그렇게 발언한 것입니다.

 

그 술자리의 따뜻한 격려는 뭐였을까. "걱정 마세요, 잘하고 계십니다"는 뭐였을까. 두 손까지 내저으며 부정하던 그 강한 반응은 뭐였을까. 함께 일하는 몇 달 동안 단 한 번도 지적하지 않았던 침묵은 또 뭐였을까.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야, 제가 그 자리에 없는 평가 회의에서, 굳이 부정적인 말을 꺼내야 했던 그 의도는 또 뭐였을까.

도쿄의 오피스 거리
도쿄의 오피스 거리

'타테마에'와 '혼네' — 한국인이 가장 늦게 배우는 단어

그제야 저는 일본 사회의 핵심 코드를 처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타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마음이라는 개념입니다. 일본어 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어요.

 

  • 타테마에(建前): 사회적 상황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입장이나 태도
  • 혼네(本音): 내면의 진짜 본심, 솔직한 생각

 

이 두 가지가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그리고 완전히 분리되어 운영됩니다. 일본인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인간적인 자리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본심'을 별개의 영역으로 다룹니다.

술자리에서의 따뜻한 말은 그 자리에서의 매너이자 타테마에이고, 본부장 앞 평가 자리에서의 차가운 한 마디는 그 자리에서의 혼네입니다. 두 가지가 서로 정면으로 모순돼도 일본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입으로 정반대의 말을 해도,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자리의 룰을 따른 것'일 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 직장에서 부하 직원에게 술자리에서 그렇게 강하게 격려해놓고, 본부장 앞 평가 회의에서 정반대의 말을 한다면, 그 사수는 직장 내에서 신뢰를 잃습니다. '앞에서는 좋은 척하고 뒤에서 험담한 사람'이 되는 거죠. 한국 직장에서는 평가가 안 좋을 것 같으면 미리 사인을 줍니다. "이 부분 좀 신경 써야하지 않아?", "개선해서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이렇게 미리 알려주는 게 한국식 '공정함'이고, 인간관계의 기본 매너입니다.

 

일본은 다릅니다. 사전 경고는 곧 인간관계의 손상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평가 시즌까지는 절대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가 자리에서는 그동안 쌓인 모든 것을 한 번에 꺼냅니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술자리는 술자리, 평가 자리는 평가 자리. 두 자리는 절대 섞이지 않습니다.

 

그날, 전 일본인에 대한 신뢰가 다소 무너졌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날, 저는 일본인에 대한 진심과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화가 나기보다는, 먼저 충격이 왔습니다. 그리고 곧 깊은 서운함이 따라왔어요. 그날 술자리에서 저에게 두 손을 내저으며 강하게 격려해줬던 그 사람이, 제가 그 자리에 없다는 이유로 본부장과 팀장 앞에서 정반대의 말을 했다는 사실. 그것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기 의지로 그렇게 말을 꺼냈다는 사실. 한국인 정서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제는 머리로는 압니다. 그 사수가 저를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닐 거라는 것을. 일본 사회의 작동 방식이 그렇다는 것을. 사수 입장에서는 술자리에서는 술자리의 룰을 따랐고, 본부장 앞에서는 그 자리의 룰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을.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두 자리에서의 말을 일치시켰겠지만, 그는 일본인이었고 그래서 두 자리를 분리했습니다. 그게 그 사회의 정상입니다.

 

그렇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건은 제 안에서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정리되기는커녕, 그날 이후 저에게는 일본인을 볼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은 의심 하나가 생겼어요. '이 사람이 지금 나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어느 자리의 모습일까. 다른 자리에서는 어떻게 말할까.' 이건 제가 한국에서 사람을 만날 때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종류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그 사건은 저에게 일본인에 대한 일종의 '편견'을 남겼습니다. 당연히 좋은 편견은 아닙니다.

친절한 미소와 정중한 인사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그래서 마음을 완전히 열기 어렵다는, 그런 종류의 부정적 편견이지요. 머리로는 '그건 일본 사회의 작동 방식일 뿐이야'라고 되뇌어 봐도, 마음 한구석의 그 거리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편견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모든 일본인이 그렇다는 뜻도 아니고, 일본 사회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한국인이 일본에 가서 한국식으로 일본인을 대했다가는, 저처럼 어느 날 한 마디 말에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한 번 새겨지면 오래 갑니다.

🍶 소감 -  일본인과 일하거나 친해질 때 기억할 5가지

  •  일본인의 '친절'을 한국식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건 그 자리의 매너이지 진심의 약속이 아닙니다. (상점이나 식당에서의 친절은 더더욱 그렇겠지요?)
  •  "걱정 마세요, 잘하고 계세요"는 격려이지 평가가 아닙니다. 평가는 평가 자리에서 따로 이루어집니다.
  •  "考えておきます(생각해 보겠습니다)"는 거의 100% 거절입니다.
  •  일본인이 술자리에서 한 약속은 술자리에서 끝납니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꺼내지 마세요.
  •  일본인과 진짜로 친해지려면 제봅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처음 몇 달의 친절함은 매너의 표현일 뿐입니다.

도쿄시내의 도심 교차로.
도쿄시내의 도심 교차로. 시부야가 유명하지만 도쿄에는 꽤 많았다

맺음말 — 20여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

지금도 가끔 그 평가 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두 손을 내저으며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외치던 사수의 그 표정과, 본부장 앞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을 그 모습이 같은 사람의 것이었다는 사실.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 두 장면이 머릿속에서 하나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평생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사이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일 관계는 오르내렸고, K-POP은 일본 젊은이들의 일상이 되었고, 일본 여행은 한국인의 가장 흔한 해외여행이 되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교류도 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어요.

 

그래도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의 마음에는 여전히 타테마에와 혼네라는 두 개의 영역이 있고, 한국인의 마음에는 여전히 그 둘을 분리하지 못하는 정서가 남아 있다는 것. 이 차이는 아마 앞으로도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일본에 가시거나 일본인과 일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들의 친절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좋지만, 그 친절을 그 자리에 두고 오시기 바랍니다. 한국식으로 가슴에 안고 오면, 어느 날 다른 자리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에 마음이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같은 시기 도쿄에서 겪었던 다른 이야기는 일본 이자카야의 진짜 모습 — 20여년 전 도쿄 근무의 기억 글에서 정리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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